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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 이 땅이 내 땅이기만 할까? - 북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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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2-05-20 23:30 조회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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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디자인연구소는 역사 그리고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공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이 땅이 내 땅이기만 할까? - 북촌에서 


 


은정태(역사디자인연구소 소장)


 


계기


  우선 갑자기 북촌 이야기를 풀어내는 까닭을 먼저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북촌은 익히 알다시피 창덕궁과 경복궁 사이에 율곡로 북쪽으로 조선시대에는 왕실, 유력 양반층이 살았고, 근대에 들어서는 교육열의 중심지였고, 2000년대 들어 한옥이 다른 주거문화로 주목받았다. 역사적으로 보면, 갑신정변의 발발지, 3.1운동 기의지, 해방정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필자가 북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15년 계동의 역사문제연구소가 이사한 것이 게기였다. 그동안 국제정치사에 관심을 두어오다가 이사 전에 기록을 남기는 차원에서 누군가로부터 글을 청탁받게 된게 계기였다. 자료를 찾아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았던 도시사의 다양한 면모를 발견하였고, 이후 도시사, 지역사라는 시야에서 서울, 지방으로 눈길이 두어졌다. 새삼 느끼는 건 ‘모든 개별적인 것이 가장 본질적이다’는 점이다. 북촌이 한국근대사를 설명하는 키워드가 될 수 있겠다고 자연스럽게 생각이 이어졌다. 앞으로 쓰게 될 몇 가지 주제는 그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다르게 보려는 노력


호기심이 중요할 것같다. 관심의 정도와 방향이 다를 수 있겠지만, 아무리 작은 것에도 세계가 담겨 있다. 창문가에 심어놓은 블루베리 화분 사이에 핀 잡초에 대한 관심과 우크라이나전쟁이나 코로나 대응, 정권교체에 대한 관심은 다른 세계의 일이긴 하지만, 과연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크기 차이는 있지 않을 듯하다. 호기심을 가지면 문제가 설정되고 그것에 접근할 프레임이 나온다.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잡초가 날아왔을까? 대단한 생명력! 식물학 영역일까? ‘네박사’에게 물어보면 다 알 수 있나? 전쟁의 배경이나 각 국가의 입장, 국제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한 관심 정도는 한국 사회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코로나는 또 어떤가?


  모든 잡초를 다르게 볼 수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잡초는 단순한 잡초가 아니다. 전쟁과 코로나도 마찬가지이다. 거기에는 자연현상과 사회현상, 국제관계가 담겨있다.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의 판단에는 사소함이든, 나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큰 문제이든...모두가 나를 구성하는 세계라는 자각이 있다. 비로소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이것이 시작이다. 늘 그렇듯이 왜? 라는 질문을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시점에 던진다면 모든 사물과 주변 환경, 사회, 세계는 다르게 보일 터. 다르게 보려는 것에 가장 방해 요소는 바로 익숙함이다. 익숙함은 편안함의 다른 이름이다. 세계에 대한 자각을 마비시킨다. 나와 세계 사이에 어떤 긴장도 없을 때이다. 무자극의 세계가 된다. 우리들은 항상 자신의 감각을 긴장 관계 위에 두기보다는 편안함 속에 두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잠시 불편한 관계가 있었더라도 얼마의 시간 뒤에는 다시 익숙해지게 되고 그에 맞추어 살아간다. 정상화 욕망이랄까. 나치의 유태인수용소 주변에 살던 평균 독일인들의 감각이 그렇게 만들어져 갔다고 한다. 서울 북촌 사람들이나 북촌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장면이 있다. 한옥, 건축, 도시, 자본, 외국인, 게스트하우스, 골목, 학교, 등등. 이 익숙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역사학과 ‘낯설게 하기’


  역사학은 어떤 인물, 사건 등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진다. 예를 들어 갑신정변은 왜 북촌에서 일어났을까 하는 것이다. 개화파의 선조들인 북학파가 이곳 북촌에 살았다는 사실이 곧장 머릿속에 떠오른다면 일단 시작이 된 셈이다. 그러면 다음 질문을 차례로 던져보자. 북학파와 개화파는 어떤 인적, 사상적 연관을 갖고 있었는지? 북촌에 개화파가 살았다는데 그들의 집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갑신정변으로 죽은 정부대신들도 이곳 북촌에 살았다는데 동네 사람들간에 일어난 살변이 북촌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이 궁금증을 시작으로 ‘갑신정변과 북촌’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 ‘장소의 상실’을 현대인들의 특징으로 이야기한다. 각자가 가진 다양한 장소기억들을 정리해 모으는 작업을 해보는 것이 요구된다. 각자의 ‘장소아카이브’가 될 것이다. 사진자료, 일기자료, 지도자료, 문서자료, 동영상 등 다양한 매체가 있다. 자기만의 다양한 주제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확장해서 북촌의 장소아카이브를 만들면 어떻게 될까? 이곳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에 대해 좁게는 지번별로, 학교단위로, 혼인관계, 사회단체로, 성별로, 경우에 따라 민족별로도 다양하게 구성할 수 있을 것같다. 공적인 장소로서 북촌을 상상해보고 의미망을 만들어볼 수 있을 듯하다. 북촌에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힘을 발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구체적으로 한번 살펴보면,


  북촌문화센터가 위치한 계동 104번지를 보자. 모두 553평이고 현재는 예담(104-1), 이도곰탕(104-2), 북촌문화센터 후면(104-3), 정담은보쌈(104-4) 등 4개로 필지로 나누어져 있다. 추적 가능한 가장 이른 시기의 이 집주인은 1912년 현재 김필한金弼漢이다. 그는 조선 23대 순조의 첫째 딸 명온공주(1810~1832)가 하가(下嫁)한 동녕위궁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명온공주는 세도정권기에 안동김씨의 김현근(1810~1868)과 혼인하였는데 동녕위궁은 그 궁호로써 관훈동의 죽동궁(현 SK빌딩)에 위치하였다. 고종은 즉위 과정에서 대왕대비 조씨의 남편 익종(순조의 아들)의 후사가 되었으므로 명온공주는 고종에게 고모인 셈이었다. 고종대에 김현근은 왕릉제사를 주관하고 경복궁 중건 당시 영건도감 제조로 활동하였고, 고종과 명성왕후의 가례에서 가례도감 당상관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김현근이 사망한 다음, 동녕위궁 터 주인은 명성왕후의 친정조카 민영익으로 바뀌었다. 안동김씨 세도정권이 끝나고 여흥민씨 세도가 시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에 따라 동녕위궁은 수송동(수송공원 일대)으로 옮겼다가 다시 계동 104번지로 옮긴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순조의 세 번째 딸 복온공주가 하가한 창녕위궁이 재동 삼양데이타시스템 자리에, 그리고 네 번째 딸 덕온공주가 하가한 남녕위궁이 계동 현대사옥 앞의 한옥상가가 위치한 재동의 음식점들이었다. 최초 혼인하여 하가한 곳은 이곳이 아니었지만 고종대에 세 공주가 하가한 집안의 후손들이 헌법재판소와 계동 현대사옥 사이의 재동 일대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회고담에서 재동학교 아래에 궁궐과 같은 큰 대문이 있는 집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김필한이라는 인물을 매개로 여러 가지 사실을 확인했는데, 그 이후 이곳에 살았음이 확인되는 인물은 1917~1927년의 김승진金升鎭이다. 그 역시 안동김씨로 영의정 김좌근 호조판서 김병기 집안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그에게도 안동김씨 몰락과 관련하여 적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풀어낸다면 이 집은 다른 집으로 보여질까? 또 다른 곳은 바로 이웃한 계동 105번지로 현재 북촌문화센터(전면)로 운영되는 곳이다. 211평이다. 북촌의 대부분 한옥이 건축주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이 집만은 건축주와 시공자, 건축시기, 건축배경 등이 잘 알려져 있어 주목되었고, 북촌한옥을 소개하는 북촌문화센터가 처음 자리하게 된 이유이다. 이 집은 탁지부 재무관을 지낸 여흥민씨 민형기(1880~1913)의 집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 그는 이곳에 산적은 없다. 이 집의 건축주는 민형기의 부인인 기계유씨(1879~1933)였으며, 그녀는 친정 오빠의 도움을 얻어 1921년 궁궐을 짓는 목수들을 불러와 이 집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창덕궁 연경당을 모델로 일부 궁궐 요소를 차용했다고 한다. 1935년 기계유씨가 사망하자 이듬해 그 아들은 이 집을 친구에게 팔고 재동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모두 기계유씨의 며느리인 ‘계동마님’ 이규숙이 남긴 기록 덕분에 재구성이 가능해진 것이다. 여기다 당대의 신문, 잡지, 관보 등의 기록을 보완하면 계동 105번지에 살았던 사람들의 풍성한 이야기꺼리가 만들어지게 된다.  


   다른 지번으로 시작된 계동 104번지와 계동 105번지는 별도의 맥락을 가진 집터이다. 2000년 이래 북촌문화센터로 이용되어온 105번지와 공공한옥으로 같은 시기 동안 한옥체험관으로 운영되던 104-3번지를 서울시가 2018년 앞 뒤로 있던 두 집의 담장을 허물어 북촌문화센터를 확장하였다. 이게 뭐 대수인가 싶겠지만 전혀 다른 맥락을 가진 두 집터를 합쳐 함께 사용하고 있는데, 이를 지적하는 경우를 전혀 보지 않았다. 북촌문화센터 전면의 105번지는 1920년대의 건축이지만 그 후면의 104-3번지는 2000년대 초반 북촌한옥조성 지원사업의 결과로 등장한 공공한옥이다.


북촌 내로 흐르는 두 산줄기 가운데 하나인 맹현(孟峴) 일부를 잘라 관광버스가 잘 다닐 수 있도록 도로로 만들려는 서울시의 구상에 북촌 주민들이 강하게 반대한 적이 있다. 게다가 그곳은 바로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의 집터이기도 하였다. 북촌문화센터의 확장 결정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본 적이 없다.


  이야기는 힘을 만든다. 즐거움을 가져다 주고 돌이켜보게 한다. 지금 그곳에 살고있는 사람이나 그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그 장소를 다르게 볼 것이다. 이상이 종적인 접근이었다면 동시대의 장소에 대한 횡적인 접근도 가능할 것이다. 1980년대 초반 현대사옥, 북촌 한옥보존지구 지정이 미친 영향, 1990년대 가회동의 한옥철거와 원서주거환경개선지구사업의 결과로 등장한 빌라촌, 2000년대 ‘북촌만들기 사업’이 남긴 한옥의 재발견, 최근 북촌지구단위계획 등을 보면서 시민, 민주화, 자본, 권력 등 다양한 가치와 주장들을 살펴볼 수도 있다. 당연하지만 어떤 장소를 읽고 기록하는 것은 다양하며 역사학은 그 가운데 한 분야일 뿐이다. 건축학 혹은 지리학, 문학 등은 전혀 다른 방식의 장소기억 창고를 갖고 있을 것이다.


 


낯설게하기는 시작일 뿐


  이 집터와 동네의 역사를 알게 된다면 개인과 사회, 국가의 선택이 어느 정도의 영향을 받을까. 북촌은 경주일 수 있을까? 혹은 경주사람들은 천년 신라의 깊이를 다 느낄까? 그 욕망을 다 제어하고 있는가? 현재 사는 사람들의 선택도 중요하다. 그 몫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어느 수준에서 어떤 방식으로 인정할 것인가? 이 집은 누구의 것인가, 혹은 누가 살았는가. 지금 당장 기록하는 것이 바로 나의 장소 아카이브가 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 땅의 주인이나 이 터가 온전히 나와만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소유권이라는 법적인 문제로 결코 대체될 수 없다. 이 터, 동네에 살았던 사람들을 대면하는 것이 이 장소가 가지는 온전한 의미 가운데 하나일 것이며, 나와 이 공간, 장소가 제대로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때문에 소유주나 세입자나 이곳에 잠시 점유하고 있다는 감각이 중요하다. ‘있다가 떠나면 그만’이라는 감각은 절대 아니다. 물론 ‘이곳은 내 땅이니 내맘대로’라는 감각도 아니다. 나의 삶이 향기롭게 혹은 불편하게 의식화된 기억저장 창고를 진지하게 탐색할 필요가 있다. 이 투사에 나나 나의 가족의 삶의 영역을 넘어서 좀 더 깊고 넓게 세대와 지역을 넘나들면서 확장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북촌에는 그 어떤 지역보다 지나온 사람들의 흔적이 두텁게 남아있다. 이 기록지를 잘 받아안고 내가 잘 기록하는 것, 이 가게와 학교, 이 길로 이루어진 풍경이 다르게 보이도록 알아가고, 동시에 사람들과 이를 공감해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일단 시작은 낯설게 하기이다. 방법은 다양할 것이다. 다양한 방법으로 비틀어보고, 깊이 보고, 기웃거려도 볼 수 있다. 빨리 정리함으로써 느끼는 청소의 상쾌함이 익숙함으로 귀결되지 않으며, 부여잡고 곱씹으면서 따져보되 단지 보수 욕망에만 그치지 않기가 중요할 것이다. 이럴 때 북촌 문화에 대한 진지한 탐색이 시작될 것이다. 앞으로 10여 차례에 걸쳐 함께 탐색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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